▲ 페라리 12칠린드리(자료사진). CZ26은 SF90 스트라달레를 기반으로 제작된 원오프 모델이다
페라리가 CZ26을 공개했습니다. 미국 고객 한 명의 의뢰로 제작된, 세상에 단 한 대뿐인 차입니다. 기반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슈퍼카 SF90 스트라달레입니다.
그런데 공개 직후 나온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미국 자동차 매체 카스쿱스는 이 차를 두고 "상상 속 기아 EV 시리즈의 슈퍼카처럼 보인다"고 평했습니다. 페라리가 내놓은 공식 설명과는 꽤 거리가 있는 감상입니다.
1. 왜 '기아 같다'는 말이 나왔나
먼저 짚어둘 것이 있습니다. 이 반응은 표절 의혹이 아닙니다. 카스쿱스가 비교 대상으로 든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기아의 전기 슈퍼카"였습니다. 실재하는 특정 모델을 베꼈다는 지적이 아니라, 디자인 언어의 인상이 그쪽 계열로 읽힌다는 감상입니다.
구체적으로 지목된 요소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전면부입니다. 얇은 디지털 조명과 검은 패널 조합이 전기차 디자인을 연상시킨다는 것입니다. 둘째, 차체 형태입니다. 페라리 특유의 곡면 대신 기하학적인 면을 강조한 구성입니다. 셋째, 그릴입니다. 전폭을 가로지르는 검은 그릴 안에 초슬림 조명을 배치한 방식입니다.
이 세 가지는 최근 전기차 디자인에서 흔히 보이는 문법입니다. 냉각 흡기구가 덜 필요한 전기차는 전면을 막힌 패널로 처리하고, 그 위에 얇은 조명 띠를 얹는 구성을 자주 씁니다. 기아 EV 시리즈가 그 흐름을 대표적으로 밀고 나간 브랜드 중 하나입니다.
즉 "기아 같다"는 말은 사실 "전기차 같다"에 가깝습니다. 내연기관 기반 슈퍼카에 전기차 디자인 문법이 얹히면서 생긴 어긋남이 그런 인상을 만든 것입니다. 함께 거론된 비교 대상이 폴스타 6였다는 점도 같은 맥락입니다.
▲ 페라리는 CZ26의 디자인이 1970년대 이탈리아 산업디자인에서 왔다고 설명했다
2. 페라리의 설명 — 1970년대 이탈리아
페라리 측 설명은 다릅니다. CZ26의 디자인이 1970년대 이탈리아 산업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나름의 근거가 있습니다. 1970년대는 이탈리아 디자인이 쐐기형(wedge)과 직선, 평면 구성에 몰두하던 시기였습니다. 자동차뿐 아니라 가전과 가구까지 기하학적 형태가 주류였고, 그 흐름을 만든 것이 마르첼로 간디니와 조르제토 주지아로 같은 디자이너였습니다.
강한 수평선과 투박스 실루엣이라는 CZ26의 특징은 실제로 이 계보와 맞닿아 있습니다. 다만 같은 형태 언어가 2026년의 눈에는 전기차처럼 읽힌다는 것이 이번 반응의 핵심입니다. 50년 전의 미래주의와 지금의 전동화 디자인이 우연히 같은 지점에서 만난 셈입니다.
전용 컬러도 준비됐습니다. 은색 계열의 알젠토 벨로체와 빨강 로쏘 람판테입니다. 실내에는 3D 프린팅으로 만든 시트와 전용 자수 로고가 들어갑니다.
3. 원오프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CZ26은 페라리의 스페셜 프로젝트로 제작됐습니다. 기존 차량의 플랫폼과 기술을 기반으로, 고객과 페라리 디자인팀이 함께 새 차를 설계해 단 한 대만 만드는 프로그램입니다.
작동 방식은 이렇습니다. 파워트레인과 섀시, 안전 구조는 양산 모델의 것을 그대로 씁니다. CZ26의 경우 SF90 스트라달레의 핵심 기술과 주행 성능이 유지됩니다. 바꾸는 것은 외판과 실내, 색상과 소재입니다.
이 구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차 한 대를 처음부터 새로 개발하려면 충돌 시험과 배출가스·소음 인증을 다시 받아야 합니다. 한 대를 위해 그 비용을 들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반면 인증받은 차의 뼈대를 유지한 채 껍데기만 바꾸면 법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성립합니다.
고객 입장에서 얻는 것은 명확합니다. 세상에 하나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차는 시간이 지나도 값이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같은 논리로 소량 한정 생산 모델이 프리미엄을 유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 원오프 제작은 마라넬로 본사 디자인팀과 고객이 함께 진행한다
4. 페라리는 왜 한 명을 위해 차를 만드나
한 대만 팔아서는 개발비를 회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페라리가 이 프로그램을 유지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가격입니다. 원오프의 가격은 공개되지 않지만, 업계에서는 통상 기반 모델의 수 배 수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개발비 상당 부분을 고객이 부담하는 구조입니다.
둘째, 고객 유지입니다. 원오프를 의뢰할 수 있는 고객은 아무나가 아닙니다. 페라리를 여러 대 구매한 이력이 있어야 자격이 주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최상위 고객을 브랜드에 묶어두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셋째, 디자인 실험실입니다. 양산차에는 넣기 어려운 시도를 원오프에서 해볼 수 있습니다. 반응이 좋으면 훗날 양산 모델에 반영됩니다. 이번 CZ26의 전면 조명 처리처럼 논쟁적인 요소도, 실제 소비자 반응을 확인하는 데이터가 됩니다.
▲ 원오프에서 시도된 디자인이 훗날 양산 모델에 반영되기도 한다
5. 정리 — 논란이 말해주는 것
정리하면 CZ26은 SF90 스트라달레를 기반으로 미국 고객 한 명을 위해 만들어진 원오프이고, 페라리는 1970년대 이탈리아 산업디자인을 참조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가격과 제작 기간, 상세 제원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기아 같다'는 반응을 어떻게 볼지는 결국 취향의 영역입니다. 다만 이 반응 자체가 흥미로운 이유는, 디자인의 주도권이 어디로 옮겨갔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자동차 디자인의 기준점은 유럽 슈퍼카였습니다. 지금은 전기차 디자인 문법이 기준선이 됐고, 그 문법을 앞서 밀고 나간 브랜드 중에 한국 브랜드가 있습니다. 페라리의 원오프를 보고 기아를 떠올리는 반응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그 변화의 한 단면입니다.
물론 페라리가 기아를 참고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비슷한 형태에 도달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그 수렴이야말로, 지금 자동차 디자인이 어느 방향으로 모이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