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비는 강원 고성군 코빌리지 고성 내에 한국전력 계통과 연결하지 않는 오프그리드 충전소를 구축한다
전기차를 충전하려면 당연히 한전 전력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국내 최대 전기차 충전 사업자 채비가 한전 전력망을 아예 끌어오지 않는 충전소를 강원 고성에 짓겠다고 나섰다. 태양광 패널로 전기를 만들고, 그 전기를 ESS(에너지저장장치)에 담아뒀다가 전기차에 흘려보내는 방식이다. 전봇대도, 계량기도, 한전 계약도 필요 없는 충전소가 국내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셈이다.
1. '오프그리드 충전소'란 정확히 무엇인가
채비와 코빌리지컴퍼니가 3일 밝힌 계획에 따르면, 이번 충전소는 강원 고성군 토성면에 조성 중인 체류형 시니어 라이프 캠퍼스 '코빌리지 고성' 부지 내에 들어선다. 설악산과 동해를 함께 조망할 수 있는 입지다.
핵심은 전력 조달 방식이다. 일반적인 급속충전소는 한전 배전망에서 전기를 끌어와 변압기를 거쳐 충전기로 공급한다. 반면 이번 충전소는 부지 내 태양광 설비에서 생산한 전력을 ESS에 저장한 뒤, 필요할 때 꺼내 써서 전기차를 충전한다. 한전 계통과는 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오프그리드(off-grid)' 방식이다. 채비는 이미 경북 구미 동락공원에서 태양광·ESS를 연계한 충전시설을 운영해 왔는데, 이번 고성 사업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한전 전력망과 완전히 분리된 독립형 모델로 확장한 사례다.
☀️ 오프그리드 충전소 작동 구조
- 1단계 발전 — 부지 내 태양광 패널이 낮 시간대 전력 생산
- 2단계 저장 — 생산된 전력을 ESS(리튬이온 배터리 기반 저장장치)에 축전
- 3단계 공급 — 충전 수요가 발생하면 ESS에 저장된 전력을 급속충전기로 방전
- 핵심 특징 — 한전 배전망 인입선, 변압기 증설, 계통 계약 절차가 전혀 필요 없음
▲ 채비는 이미 전국 곳곳에서 급속충전 인프라를 운영 중이며, 이번엔 한전 전력망 없이 돌아가는 오프그리드 모델을 고성에 짓는다 (참고 이미지)
▲ 태양광 패널을 지붕처럼 얹어 발전과 충전을 한 부지에서 해결하는 방식은 국내에서도 시범 운영되고 있다 (참고 이미지)
2. 왜 하필 고성인가 — 코빌리지컴퍼니와의 협업 구조
이번 사업은 채비 단독이 아니라 코빌리지컴퍼니와의 업무협약을 통해 진행된다. 코빌리지컴퍼니는 고성 부지에 299세대 규모, 2029년 오픈을 목표로 하는 체류형 시니어 라이프 캠퍼스 '코빌리지 고성'을 개발 중이다. 두 회사는 연내 본계약 체결을 목표로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역할 분담은 명확하다. 코빌리지컴퍼니는 캠퍼스 전체 개발을 맡고, 채비는 급속충전 인프라 구축·운영과 함께 충전·휴식·식음료·리테일을 결합한 복합공간 '채비스테이'를 조성한다. 채비는 이 프로젝트에 전략적 투자자(SI)로도 참여하는 방안을 협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설악산·동해 관광권에 위치한 만큼, 완속·거주형 충전 수요보다는 관광객과 캠퍼스 입주민을 겨냥한 체류형 급속충전 거점으로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
양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코빌리지가 향후 수도권 근교, 제주, 해외로 사업지를 확장할 때 채비가 우선적으로 충전 인프라 구축에 협력하기로 했다. 단발성 프로젝트가 아니라 시니어 주거 브랜드와 충전 인프라 사업자가 함께 성장하는 장기 파트너십 구조인 셈이다.
▲ 설악산·동해 관광권에 자리한 고성처럼, 산림·관광지형 입지는 배전망 여유 용량이 부족해 오프그리드 방식이 강점을 가질 수 있는 대표적인 입지로 꼽힌다 (참고 이미지)
3. 오프그리드가 필요했던 이유 — '계통연계 대기'라는 병목
그렇다면 왜 굳이 한전 전력망을 포기하면서까지 오프그리드 방식을 택했을까. 배경에는 국내 전기차 충전 인프라 확대를 오랫동안 괴롭혀 온 계통연계 대기 문제가 있다.
급속충전기 여러 대를 한 부지에 설치하려면 통상 수백 kW 이상의 수전 용량이 필요한데, 이만한 전력을 끌어오려면 한전에 계통 접속을 신청하고 배전선로·변압기 증설 공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특히 산간·관광지·신도시 외곽처럼 기존 배전망 여유 용량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인입 공사에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이 걸리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사업자 입장에서는 부지도, 자금도, 사업 계획도 다 갖췄는데 정작 '전기를 끌어오는 데'만 발목이 잡히는 상황이 반복돼 온 셈이다.
오프그리드 방식은 이 병목을 원천적으로 우회한다. 태양광·ESS만으로 자체 전력을 조달하면 한전 계통 접속 신청, 배전 공사 대기, 계약전력 증설 같은 절차 자체가 필요 없어진다. 관광지·캠퍼스처럼 기존 전력망 인프라가 얇은 입지에서도 충전소를 빠르게 세울 수 있다는 점이 이 방식의 가장 큰 실익이다. 채비가 '충전기 제조·운영'을 넘어 태양광·ESS·V2G(Vehicle-to-Grid)를 아우르는 에너지 사업으로 영역을 넓히겠다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과 맞닿아 있다.
▲ 오프그리드 충전소의 전력원은 이런 대규모 태양광 발전 설비와 같은 원리로, 부지 내에서 자체 발전한 전력을 그대로 소비한다 (참고 이미지)
4. 해외에도 있다 — 커지는 오프그리드 충전 시장
한전 계통 없이 돌아가는 충전소라는 개념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상용화 단계에 들어선 방식이다. 미국의 빔 글로벌(Beam Global)은 태양광 패널과 배터리를 일체형으로 갖춰 별도의 전력 인입 공사 없이 어디든 설치할 수 있는 오프그리드 충전 유닛 'EV ARC'를 완성차 업체 등에 공급하고 있다. 전력망이 부실하거나 아예 없는 오지, 재해 복구 현장, 임시 행사장처럼 배전 공사 자체가 비현실적인 곳에서 특히 활용도가 높다.
시장 조사 업계에서는 태양광·ESS 결합형 충전 인프라 시장이 재생에너지 투자 확대와 전기차 보급 증가에 힘입어 매년 두 자릿수대로 성장하고 있다고 본다. 국내에서도 도서 지역, 산간 관광지, 신규 택지처럼 배전망 확충이 더딘 곳을 중심으로 유사한 수요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번 고성 사업이 국내 첫 완전 자립형 사례로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 항목 | 오프그리드 충전소 | 일반 계통연계 충전소 |
|---|---|---|
| 전력원 | 태양광 발전 + ESS 저장 | 한전 배전망 직접 수전 |
| 구축 절차 | 계통 접속 신청 불필요 | 계통 접속·배전 공사 필요 |
| 구축 기간 | 인입 대기 없이 상대적으로 단축 | 수개월~수년 소요 가능 |
| 적합 입지 | 산간·관광지·배전망 취약 지역 | 기존 배전망 여유 용량이 있는 도심·간선 |
| 운영 안정성 | 일사량·ESS 용량에 좌우 | 날씨와 무관하게 안정적 공급 |
| 초기 투자 | 태양광·ESS 설비 투자 필요 | 상대적으로 낮은 초기 설비 부담 |
5. 채비는 어떤 회사인가 — 충전 서비스와 제조를 함께 하는 CPO
채비는 국내 최대 규모의 전기차 충전 사업자(CPO)로, 충전 서비스 운영과 충전기 제조를 동시에 하는 구조가 특징이다. 올해 상반기 연결 매출은 496억 원으로 전년 대비 29.8% 늘었는데, 그중 충전 서비스 부문이 285억 원(+19.1%), 충전기 제조 부문이 212억 원(+47.5%)을 기록하며 두 사업이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최근에는 한국도로공사와 손잡고 고속도로 휴게소 29곳에 급속충전기 131기를 구축하는 사업도 추진 중이며, 자세한 내용은 채비 고속도로 휴게소 충전기 구축 기사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상반기 실적 전반은 채비 상반기 실적 기사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이번 오프그리드 사업은 채비가 단순 충전기 사업자에서 '에너지 사업자'로 영역을 넓히는 신호탄으로 읽힌다. 태양광 발전, ESS 저장, 나아가 전기차 배터리를 전력망 자원으로 활용하는 V2G까지 아우르는 종합 에너지 플랫폼 기업으로 전환하겠다는 구상이 이번 고성 프로젝트에 압축돼 있다.
▲ 오프그리드 충전소는 태양광 발전 설비에서 생산한 전력을 ESS에 저장했다가 충전에 활용한다 (참고 이미지)
6. 남은 과제 — 날씨 의존성과 확장 가능성
물론 오프그리드 방식이 만능은 아니다. 태양광 발전은 일사량과 계절에 따라 출력이 달라지고, ESS 용량이 충분하지 않으면 흐린 날이 이어지거나 충전 수요가 몰릴 때 공급이 부족해질 수 있다. 한전 계통처럼 날씨와 무관하게 안정적인 전력을 24시간 공급받는 구조와는 태생적으로 다르다. 결국 태양광 발전량 예측, ESS 용량 설계, 필요시 보조 전력원 확보 같은 운영 노하우가 사업 성패를 가를 변수가 될 전망이다.
▲ ESS는 전기차 배터리와 유사한 리튬이온 배터리 기반 저장장치로, 태양광 발전량을 시간차를 두고 충전에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 (참고 이미지)
그럼에도 이번 고성 사업이 갖는 의미는 분명하다. 배전망이 부족한 지역에서도 충전 인프라를 빠르게 확장할 수 있는 대안 모델을 국내에 처음으로 실증한다는 점이다. 코빌리지가 수도권·제주·해외로 확장될 때마다 채비가 함께 움직이기로 한 만큼, 이번 실증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는다면 계통연계 지연에 발목 잡혀 있던 국내 다른 지역의 충전 인프라 확대에도 참고할 만한 선례가 될 수 있다.